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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선영 작성일21-01-11 14:45 조회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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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화면 캡쳐


[OSEN=장우영 기자] 개그맨 이용식이 40kg을 감량한 딸 이수민에 대한 애정과, 김학애 가족과 ‘사돈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파워볼게임

지난 11일 방송된 JTBC ‘1호가 될순 없어’에서는 임미숙-김학래 ‘숙래부부’가 아들 동영이와 함께 오랜 친분이 있는 이용식의 집을 방문했다.

이용식의 딸 수민이와 동영이를 사윗감, 며느릿감으로 탐내며 어른들이 사랑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부족한 재료를 사러 나간 수민이와 동영이의 설레는 투샷이 보는 이들의 심박수를 증가시켰다. 여기에 스튜디오에서 이를 지켜보는 또 다른 며느릿감 장도연이 적재적소에서 코믹한 리액션으로 재미를 끌어올렸다.

의도치 않게 상견례처럼 식탁에 마주 앉은 두 가족은 임미숙의 깨알 상황극과 동영이의 스윗한 매너, 오고 가는 유쾌한 대화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더불어 클래식과 트로트를 넘나드는 수민이의 첼로 연주와 노래에 맞춰 춤추는 임미숙, 김학래의 모습이 해피바이러스를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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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후 OSEN과 통화에서 이용식은 “딸바보 용어의 시작이 내게서 됐다. 결혼해서 1년 만에 아이를 얻는 것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으려던 때에 얻은 아이에 대한 애정과 생각은 천지차이다. 8년 반 만에 얻은 아이라 난 딸만 바라보는 딸바라기이다. 처음에는 ‘딸바보’가 내 딸이 바보라는 말로 오해해 싫었었는데, 이후 화기애애한 가족과 딸을 아끼는 아빠를 ‘딸바보’라고 하더라. 딸바보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후로는 딸을 더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용식의 딸 이수민은 40kg을 감량했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시청자들은 ‘긁지 않은 복권이었다’고 말하기도. 이용식은 “복권이 될지 안될지 모르니 떨리는 마음으로 갖고 있었는데 어느날 느닷없이 긁어볼까 해서 긁었더니 당첨됐다. 처음에는 내 모습이 사라져서 아쉬운 것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용식은 “방송을 함께 본 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뚱뚱했을 때는 아빠와 닮아서 알아봤지만 이제는 ‘이용식의 딸’, ‘40kg 감량’ 등이 붙기 때문에 올바르고 똑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며 “그랬더니 딸이 ‘아빠와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체중은 무거워지지 않았지만 마음이 40kg 더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내 말을 다 알아듣고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용식은 딸 이수민과 김학래의 아들 김동영의 ‘하트 시그널’에 대해서는 “아무리 부모가 나선다고 해도 당사자들의 눈높이가 서로 맞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결혼이 운명, 필연이 아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김학래의 아들과 그 기적을 이루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마음이 맞다면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이용식은 “임미숙과 김학래의 심성을 알기에 만약 사돈이 된다고 하면 딸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임미숙이 정말 내 딸을 예뻐하고, 그 집안과 종교도 같다. 딸이 남자를 만날 때 종교가 같았으면 한다고 하는데 95%는 맞아 떨어진 셈이다. 나머지 5%는 아이들의 마음이다”고 이야기했다.

끝으로 이용식은 “내 삶의 모토가 입장을 바꿔놓고 살자이다. 개그맨 후배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픈데, 코로나19 시국이 좀 나아지면 함께 방송, 유튜브, 라이브 커머스 등을 해보고 싶다. 특히 ‘웃고 싶을 땐 어디를 보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실 수 있도록 개그맨 선배들과 후배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elnino8919@osen.co.kr

CES서 디스플레이 혁신 기술 총망라…유기발광 소자 개발로 화질 완성도↑

LG디스플레이는 11일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미디어 대상 CES 2021 오프라인 전시장 투어를 진행했다. [사진=LG디스플레이]


[아이뉴스24 서민지 기자] LG디스플레이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대세화'를 위해 칼을 갈았다. 화질을 높여 한 단계 진화한 OLED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투명, 롤러블, 벤더블, 필름 시네마틱 사운드 OLED(필름 CSO) 등 차별화된 제품을 내세워 시장 공략에 고삐를 죄는 모습이다.

LG디스플레이는 11일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미디어 대상 CES 2021 오프라인 전시장 투어를 진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행사는 소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한정적으로 이뤄졌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반기는 건 투명 OLED가 탑재된 침대다. 침대 프레임 내부에 OLED가 내장됐으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화면비로 사용할 수 있다. OLED 일부를 올려 날씨 등 간단한 정보를 확인하고, 전체를 올려 TV나 영화를 시청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침대 프레임은 OLED TV 패널과 스피커 등이 탑재됐음에도 얇게 구현됐다. OLED 자체가 얇은 데다 스피커가 기존 10분의 1 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침대프레임은 독립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이동하면서 어디서나 TV를 볼 수 있다.


전시장에 마련된 '레스토랑 존'은 손님과 요리사 사이에 투명 OLED를 설치한 스시바로 연출됐다. [사진=LG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는 지하철, 레스토랑 등에서 사용되는 투명 OLED 솔루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투명 OLED는 패널 뒤를 투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 LCD의 경우 투명도가 10%대에 불과하지만, OLED는 40%의 투명도를 구현한다.

전시장 한켠에는 지하철과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지하철 객실 유리창을 투명 OLED가 대체해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으면서도 노선도 등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바깥 상황이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차이 없이 선명한 화질을 구현한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코로나19에 따른 '언택트 사회'에서 투명 OLED의 활용도는 더욱 빛을 발한다. 전시장에 마련된 '레스토랑 존'은 손님과 요리사 사이에 투명 OLED를 설치한 스시바로 연출됐다. 투명 OLED는 파티션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메뉴를 주문하거나 대기하면서 영화나 스포츠 경기 등을 볼 수 있어 활용도가 높아 보였다.

화면에서 소리가 나는 필름 CSO도 시선을 모았다. 필름 CSO 패널은 별도의 스피커 없이 OLED 패널 자체가 진동해 화면에서 직접 소리를 내는 'CSO' 기술이 적용됐다. 0.6mm 크기의 종이 같은 스피커가 적용돼 패널 두께는 얇게 유지됐다.

실제 화면에 손을 대니 큰 소리가 날 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화면 앞으로 소리가 나오다 보니 일반 TV보다 음향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됐다. LG디스플레이는 이같은 기술을 벽지에도 적용, 앞·뒤·좌·우에 스피커를 따로 설치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느낌이 들었다.


필름 CSO 패널은 별도의 스피커 없이 OLED 패널 자체가 진동해 화면에서 직접 소리를 내는 'CSO' 기술이 적용됐다. [사진=LG디스플레이]


OLED는 구부렸다가 펴지는 '벤더블' 디스플레이로도 활용됐다. 평소 TV를 볼 때는 평면으로 사용하다가 영화 등 몰입감 있는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할 때 곡률을 조절해 '맞춤형'으로 즐길 수 있었다. 벤더블 디스플레이에 CSO 기술을 적용할 경우 몰입감은 배가 된다.

LG디스플레이는 OLED TV 패널의 화질을 한 차원 진화시키기도 했다. 유기발광 소자의 근간을 이루는 유기물 재료를 고효율 물질로 개선하고, 소자 속 실제 빛을 내는 발광 레이어를 1개 층 더 추가해 OLED의 발광 효율을 기존 대비 약 20% 향상했다. 발광 효율이 높아지면 휘도가 좋아져 더욱 선명한 색상의 화질을 감상할 수 있다.

OLED TV의 진가는 어두울 때 드러났다. OLED TV와 LCD TV와 비교 시연했을 때 일반 밝기에서도 선명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특히 어두울 때 차이가 분명했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는 모습을 두 화면에 띄웠을 때 OLED TV는 수많은 별을 그대로 구현했지만 LCD TV의 경우 별 주변부까지 환해져 전반적으로 뿌연 느낌이 들었다.

LCD TV의 경우 백라이트를 탑재, LED를 부분적으로 제어하는 '로컬디밍' 기술을 구현한다. 이 때문에 밝은 화면 주변부까지 환해지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반면 OLED의 경우 소자 하나하나를 컨트롤한다는 장점이 있다.

윤수영 LG디스플레이 CTO 전무는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선명한 화질을 구현하면서도 눈에 피로도가 낮은 TV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며 "OLED는 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유일한 솔루션으로, 앞으로도 사람을 중심으로 한 디스플레이 기술과 제품을 지속 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지기자 jisse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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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IT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지난 10일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57년만에 새로운 로고를 공개했다. 앞서 6일 기아자동차(000270)도 새로운 사명과 함께 로고와 슬로건을 모두 교체했으며 현대자동차(005380)그룹도 사명에서 '자동차'를 빼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자동차가 2019년 2월 공개한 크로스오버 EV 콘셉트카 티저 이미지./기아자동차

지난해부터 완성차업계의 로고변화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다. 기업을 대표하는 로고는 전통과 이미지 연속성을 위해 수십년간 그 형태를 유지하는게 일반적이고, 때문에 미래지향적이면서 단순명료한 로고 디자인이 요구된다. 건물 간판부터 제품 라벨 교체까지 큰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완성차업체들이 줄줄이 로고를 변경하는 추세는 업계에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GM 로고 변천사. /그래픽=정다운

최근 완성차 업체 로고 변화의 핵심은 친환경, 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혁신이다. 기업들은 새로운 로고를 선보이며 새로운 브랜드 방향성과 로드맵을 제시한다. 전날 GM이 공개한 새로운 로고는 선명한 하늘색 글씨를 강조했다. 탄소 배출 제로의 비전이 실현된 미래의 청명한 하늘과 GM ‘얼티엄(Ultium) 플랫폼’의 친환경 에너지를 상기시키는 의미다. GM은 지난해 초 새롭게 개발한 얼티엄 배터리와 이를 동력원으로 하는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을 공개한 바 있다.

GM은 로고를 대문자에서 소문자로 바꾸고, 소문자 m 밑에 밑줄을 그어 기존 GM 로고 디자인을 계승했다. 동시에 GM의 새로운 전기차 플랫폼인 '얼티엄 플랫폼'을 시각화 했으며, 소문자 m 주변의 빈 공간은 전기 플러그 모양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GM은 1938년 창사 이래 지금까지 총 네 번 로고를 변경했다. 회사 설립 직후 사용된 로고는 1908년 최초 법인 증명서를 모티브로 제작돼, 제너럴모터스의 앞글자인 GM을 대문자로 적고 수직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을 도입해 오늘날 GM 로고의 근간이 됐다. 이후 1964년 GM은 로고를 보다 단순명료하게 만들고자 GM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글자 아래 밑줄만 남겼으며 로고 색깔도 검정색에서 파란색으로 교체했다.

2001년 GM로고는 3차원에 음영효과를 도입해 눈에 더 잘 띄도록 강조했다. 로고를 강조하는 기조는 다음 버전 로고인 2010년대 로고에도 이어졌다. GM은 2009년 파산 이후 정부 관리를 받은 후 새로운 GM 출범과 함께 이미지 쇄신을 위한 새로운 로고를 발표했다. GM글자가 쓰인 중앙 부분을 하이라이트하고 글자를 테두리로 강조해 최근까지 가장 익숙하게 쓰인 로고다.


기아자동차 로고 변천사. /그래픽=정다운

기아차가 발표한 로고와 슬로건도 이와 유사하다. 기아차는 필기체의 기아(KIA) 알파벳이 연결된 새로운 로고를 공개하며 균형, 리듬, 상승의 세가지 디자인 컨셉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기아차가 지난해 발표한 중장기 전략 '플랜 에스(Plan S)'의 일환으로, 사업 재편을 통해 미래 모빌리티 산업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립하겠다는 기아차의 의지가 담겼다.

1953년부터 지난해까지 기아차가 사용한 로고는 총 6종이다. 1944년 경성정공을 모태로 1952년 기아산업으로 자전거와 삼륜차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기 로고에 톱니바퀴 형태가 들어간 이유다. 이후 1986년부터 기아의 영문 'Kia'가 쓰이기 시작했고, 생동감과 진취성을 강조하기 위해 빨간색의 로고를 이어왔다. 기아차는 오는 15일 새 로고에 대한 이미지와 비전, 전기차 사업에 대한 구체방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지난해 공개된 폴크스바겐의 새로운 로고(좌)와 닛산의 새로운 로고(우)

새로운 로고는 과거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은 업체들에게 이미지 쇄신 효과를 주기도 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사람이 이름을 바꾸는 것과 유사하다. 지난해 4월 로고를 교체한 폴크스바겐이 대표적이다. 2015년 '디젤게이트' 로 알려진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을 겪으며 폴크스바겐의 파란색 기존 입체 로고는 각종 언론보도 전면에 등장하며 비판의 아이콘이 됐다.

이후 폴크스바겐은 오명을 지우기 위해 수 년 간 탈내연기관과 전기차 개발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를 계기로 폴크스바겐은 첫 전용 플랫폼 순수전기차인 ‘ID. 3’의 공개와 더불어 2차원의 새로운 남색 로고를 공개했다. 디젤게이트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전기차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카를로스 곤 전 회장 사건 및 경영 실적 악화를 겪고 있는 일본 닛산도 새 전기차를 공개하면서 로고 변경에 나섰다. 카를로스 곤 전 닛산자동차 회장은 일본에서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재판을 앞둔채 도주했으며 닛산은 심각한 경영위기로 일본 정부의 보증을 받아 1조 5000억원의 긴급자금을 조달했다.

이에 지난해 7월 닛산은 신형 전기차 아리야를 공개하고 재기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19년만에 새로운 로고를 공개했다. 닛산에 따르면 로고를 둘러싼 원은 '아침 해'를, 검은색으로 쓰인 회사명은 '성실함'을 상징한다.

[민서연 기자 mins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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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④]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李準泰, 1892~1950)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기자말>

[장호철 기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②]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권오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③] 제3차 조선공산당(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



▲ 이준태(사진)는 김재봉, 권오설과 함께 '풍산 트로이카'를 이루었으나 유일하게 서훈을 받지 못했다. 셋은 고비마다 핵심적 역할을 해 '풍산 트로이카'라 불리웠다.
ⓒ 국사편찬위원회


풍산 오미마을의 김재봉(1890~1944)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것은 조선노동대회의 대표로서였다. 비록, 경북 안동 와룡 출신의 안상길(1892~1958)과 함께 임정 선전과 자금모금을 하다가 붙잡혀 6개월 징역을 살긴 했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김재봉이, 내로라하는 조직의 대표들이 모인 극동 민족대회에 참석한 것은 일종의 '미스터리'(최백순, <조선공산당 평전>)였다.

대회 뒤,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며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한 김재봉이 조선공산당 창당의 밀명을 띠고 15개월 만에 귀국한 것도, 1925년에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가 된 것도 그 미스터리의 연장선에 있었다. 경성공업전습소(경성고등공업학교의 전신, 뒤에 서울대 공대로 재조직)에서 공부한 뒤, 귀향해 강습소를 열었던 그가 국내의 대표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대회 대표로 선임된 것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재봉의 극동 민족대회행의 열쇠, 이준태

김재봉의 전격적 등장에 관해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최백순은 이러한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로 동향인 이준태를 제시한다. 풍산 우렁골(상리리) 출신으로 김재봉보다 2년 아래인 이준태는 김재봉과 경성공업전습소 동문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총독부 측량기사로 일하던 이준태는 김재봉과 함께 안상길을 만나 함께 일했지만, 구속은 피했다.

두 사람이 가입해 있던 조선노동대회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6장의 극동 민족대회 대표권을 배정받았는데, 그 마지막 한 장이 김재봉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최백순은 조선노동공제회나 조선노동대회와 달리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쥔 노동 대중 조직을 꾸리려 했던 이준태에게 이 모든 결정의 열쇠가 있으리라 추정한 것이다.

1920년께 안상길·김재봉과 함께 임정 일을 함께하기 이전에 이미 이준태는 서울에서 그 존재를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7월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학우회 주최 순회 강연 변사 제군'이라는 글로 청년들에게 민족 사랑을 요구하였다. 이듬해에는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들에게 '강연단을 조직하여 농촌으로 가라'는, 마치 1930년대의 '브나로드 운동'을 연상하게 하는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이준태는 1920년에 노동운동 조직인 조선노동대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최백순은 조선노동대회를 이끌던 안동 출신 사회주의자 노병희가 이준태와 '노동이라는 공통분모'로 알고 지냈을 것으로 보았다. 결국 갓 출옥한 김재봉에게 극동 민족대회행 대표권이 돌아가게 한 데는, 이준태의 역할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준태는 노동운동에 입문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1922년 1월, 김한(1887~1938, 2005 독립장), 신백우(1889~1962, 1990 애국장) 등과 서울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무산자동지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3월에는 무산자동지회와 신인동맹회가 통합한 무산자동맹회의 상무위원이 되어 기관지 <무산자> 발행에 힘을 보탰다.


▲ 이준태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 깊숙한 눈길로 응시하는 것은 역사일까.
ⓒ 국사편찬위원회


이 무렵 이준태는 김한·신백우 등이 활동하던 '조선공산당'(1925년 창당된 조선공산당과는 다름. '중립당')'에 가담하였다. 10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가 분화한 혁명적 성격의 노동단체 조선노동연맹회에도 참여했다. 1923년 3월 서울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청년단체 전조선청년당대회에도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이처럼 이준태를 비롯한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활동의 범주를 넓혀 가면서 사회주의 지향을 명확히 하며 조선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23년 5월, 김재봉이 15개월 만에 코민테른 국내부 책임자가 되어 러시아에서 귀환한 뒤, 곧바로 꼬르뷰로(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가 조직될 수 있었다.

풍산소작인회와 조선공산당 2차당 차석 비서

그해 7월, 서울에서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투쟁을 전개하자 이준태는 윤덕병·김남수 등과 함께 '고무 여직공의 동맹파업 전말서'라는 선전문을 작성, 전국의 노동단체에 배포하였다. 이것이 추후 문제가 되어 그는 윤·김과 함께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같은 달, 이준태는 사회주의 연구 목적의 '신(新)사상연구회'의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신사상연구회는 이듬해 11월, 마르크스의 생일에서 따온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 성격을 분명히 했다. 1923년 11월, 고향으로 내려온 이준태는 권오설 등과 함께 소작농뿐 아니라 자작농·중소 지주·진보적 청년 지식인들이 참여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월에는 안동에서 화요회의 지회 격인 '화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달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위한 준비그룹이 발행하려는 사회주의 잡지 <화화(火花, 불꽃)>의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2월에는 화요회에서 사회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기본방침을 토의하고자 개최한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의 안동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조공)이 서울에서 창립되었을 때, 이준태는 안동에서 풍산소작인회와 화성회 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8월에 풍산소작인회는 읍내에 풍산 소작인회관을 준공하고 그 낙성식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5000여 명이 참석한 낙성식에서 이준태가 식사(式辭)를 맡았고, 안동청년연맹의 김남수가 축사를 했다. 식이 끝나고 수천 명 군중은 적색기와 악대를 앞세우고 시가지를 누볐다고 전한다.

서울에서 당이 창당되었는데도 이준태가 안동에 머문 것은 이러한 지역 활동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예비 간부를 중앙에서 분리'(김희곤)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해 8월에 예천의 보수 단체 회원 수천 명이 형평사 예천 분사를 기습한, 이른바 '예천 사건'이 일어났다. 이준태는 이 사건에 대응하여 안동 12개 단체가 공동으로 꾸린 연합 회의의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1월에는 '도산서원 소작인 태형(笞刑) 사건'이 일어났다. 서원에서 1920년에 조선총독부가 폐지한 형벌을 소작인에게 가한 사건에 안동의 사회단체들은 경악했고, 이에 도산서원 철폐 운동으로 맞섰다. 풍산소작인회에서는 별도의 전문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이준태 이름은 13명 명단의 맨 앞에 있었다.


▲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주역들인 김재봉(풍산 오미리), 이준태(풍산 상리리), 권오설(풍천 가곡리)을 모두 안동시 풍산 주변 출신이라 '풍산 트로이카'를 이루었다.
ⓒ 장호철


이준태가 다시 상경한 것은 11월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이 발생하면서였다. 조공 산하 고려공산청년회(공청) 책임 비서 박헌영 내외 등 당원 1백여 명이 검거된 조직의 위기에 김재봉이 이준태를 소환한 것이다. 김재봉은 강달영을 책임 비서로, 이준태·홍남표·이봉수·김철수 등 5명에게 조직을 맡기고 피신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듬해(1926) 2월, 강달영의 2차당에서 중앙집행위원 이준태는 비서부 차석과 당 교섭 대표자로 선임되었다. 2차당에는 동향 후배 권오설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로 참여했는데, 이들은 2차당 조직 과정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4월에 순종이 사망하자, 공청의 권오설은 인산일에 민중항쟁을 기획하였지만, 사전에 기밀이 새어 조공은 당원 1백여 명이 잡히는 등 치명상을 입었다. 이것이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이다.

권오설에 이어 이준태도 일경에 체포되었다. 길고 지루한 공판이 이어지면서 이준태와 권오설 등 5명의 피고인은 일제 경찰을 '폭행과 학대, 직권 남용'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1928년 2월에 이준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준태는 1930년 10월 출옥해 풍산 우렁골로 돌아왔다. 김재봉과 마찬가지로 일경의 감시로 나들이도 자유롭지 못해 그는 칩거 생활을 이어갔다. 풍산 읍내에 잡화점을 열었던 이준태는 해방이 되자, 셋째 아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서울로 갔다.

이후 이준태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게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1945년 12월 전국 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안동군 대표로 참가, 검사 위원으로 선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일가의 비극과 '풍산 트로이카' 중 유일한 미서훈

경기도 양주에 있는 이씨 문중 재실에서 머물다가 이준태가 귀향한 것은 6·25전쟁이 일어난 뒤였다. 그는 9월 국군의 북진을 따라 북상 길에 올랐다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경북의 산악지대를 지나다가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월북설도 있긴 하지만, 그가 평양에 나타났음을 전하는 자료는 전혀 없으니 믿기 어렵다.

그의 종적이 끊긴 뒤, 가족들에게 남은 것은 고초뿐이었다. 이준태 아내는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고, 맏아들은 1953년 1월 마을 근처에서 우파 세력에게 총살되었다. 둘째 아들은 서울에 살다 피난길에 올랐다가 한강 다리 폭파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풍산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던 셋째는 부친과 관련한 주변의 신고로 곤욕을 치르다 집을 나갔다. 한 집안이 풍비박산난 것이다.

안동 출신의 사회주의자들,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의 주역들인 김재봉(애국장), 권오설(독립장), 김남수(애족장) 등은 2005년에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핵심적 역할을 해 '풍산 트로이카'를 이루며, 조선공산당 창건 전후 당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중요하게 활동했던 이준태만이 서훈에서 제외되었다.

사회주의자로 독립투쟁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조선공산당 경북도기관 책임 비서 안상길(1892~1958), 권오설의 동생으로 <해방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권오직(1906~1953),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안기성(1898~?) 등은 해방 후 북으로 갔다. 그러나 북으로 가지도 않았고, 해방 정국에서 좌익 활동도 거의 드러나지 않은 이준태가 이렇게 잊힌 존재가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 경북 안동 풍산읍 상리리 364번지, 새로 단장한 이준태의 생가. 입구 울타리 게양대에 태극기가 무심히 휘날리고 있다. 집 오른쪽 측면에 따로 문을 달아 처마에 그의 호를 딴 ‘一烽齋(일봉재)’라는 편액을 걸어놓았다.
ⓒ 장호철



▲ 생가 오른쪽 칸의 일봉재 안에 모신 이준태의 흉상. 그 위에 낡은 태극기가 걸렸다. 낮과 밤에 두 차례나 찾았지만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 장호철


경북 안동 풍산읍 상리리 364번지 이준태 생가는 퇴락을 거듭하다가, 최근 손자며느리가 묵은 집의 대들보만 살리고 새로 단장한 집을 지키고 있다. 집 오른쪽 측면에 따로 문을 달아 처마에 그의 호를 딴 '一烽齋(일봉재)'라는 편액을 걸어놓았다. 일봉재에는 '항일 애국지사 일봉 이준태 상'이라 새긴 흉상이 놓였고, 그 위로 낡은 태극기가 걸려 있다.

태극기는 집 출입구 쪽 울타리 게양대에도 걸려 있다. 무심하게 휘날리는 깃발은 마치 풍산 트로이카 중 유일하게 서훈을 받지 못한 데 대한 후손들의 항의처럼 보인다.

청년 이준태가 열망한 혁명과는 무관하게 그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다고, 대한민국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무언의 시위처럼. 그러나 일봉재에 모신 흉상과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 이준태의 깊숙한 눈길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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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로 파악"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한 다세대주택에서 40대 남녀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1일 오전 2시40분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의 다세대주택 A(41·남)씨 집 앞 복도에서 A씨와 B(41·여)씨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이들은 이를 목격한 사람에 의해 신고가 접수돼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이들의 시신에서는 흉기에 찔린 상처가 발견됐다.

경찰은 A씨와 B씨가 서로 다투다가 흉기에 찔린 것으로 추정하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A씨와 B씨는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인 것으로 파악됐다"며 "어떤 경위로 사건이 발생했는지, 자세한 관계와 범행 경위 등은 조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파워볼실시간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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